<2.8독립선언계기 기고> 2.8독립선언 재평가돼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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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08.02.20
조회수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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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 재평가돼야 하는 이유
2008년 2월 8일은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던 600여 명의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지 제 89주년이 되는날이다.
독립선언! 많은 사람들이 3.1독립선언은 잘 알고 있겠지만 2.8독립선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당시 제 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한 것과 주미 한국인이 미국에 한국 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 파리 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약소민족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열강의 보도를 계기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 분위기를 이어 1919년 2월 동경에서 재일 유학생을 주축으로 독립선언문이 발표됐는데 이것이 바로 2.8독립선언서이다.
최팔용,서춘,백관수 등 10명이 실행위원으로 조선청년독립단을 구성하고 이광수가 문안을 작성하여 600여회원의 환호 속에 발표되었다.
"전 조선 청년 독립단은 우리 2천만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를 쟁취한 세계 모든 나라 앞에 독립을 성취할 것을 선언한다."로 시작되는 선언문은 일제 침략 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을 규탄하였다.
또한, 미국과 영국이 일제의 조선침략을 승인한 것과 일본의 10년간의 식민 통치를 비판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제시하였다.
이 선언문은 일문,영문으로 인쇄되어 우편으로 동경 주재 각국 대사관, 공사관, 조선총독 및 각 신문사로 보내졌고, 이로써 한국은 4,300여 년의 유규한 역사를 가진 자주 독립국임을 강조하고 일제가 식민통치를 계속한다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투쟁할 것이며 독립 후에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모범을 따라서 신 국가를 건설하고 반드시 세계평화에 공헌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비록 행사는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10명의 실행 위원을 포함한 27명의 유학생이 검거되었지만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2.8독립선언문이 오늘날 재평가받아야 하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 들면 첫째는 젊은 유학생이 주축이 되어 작성된 만큼 어조가 강경하고 단호하다는 것과 그 사상이 진보적이라는 데 있고 둘째는 당시 재일 유학생들이 법.정치.경제 등을 전공한 인재들이라 훗날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조국을 잃은 설움에도 실의에 빠지지 않고 독립을 위해 투쟁한 젊은 학생들의 혈기가 대한민국 독립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날의 선언은 특히 청년 실업률이 15.4%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 용기를 준다는것에서 더욱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 잃은 슬픔도 이겨냈는데 이런 어려움쯤이야 툭툭 털어내고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보훈과 강유정
2008년 2월 8일은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던 600여 명의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지 제 89주년이 되는날이다.
독립선언! 많은 사람들이 3.1독립선언은 잘 알고 있겠지만 2.8독립선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당시 제 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한 것과 주미 한국인이 미국에 한국 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 파리 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약소민족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열강의 보도를 계기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 분위기를 이어 1919년 2월 동경에서 재일 유학생을 주축으로 독립선언문이 발표됐는데 이것이 바로 2.8독립선언서이다.
최팔용,서춘,백관수 등 10명이 실행위원으로 조선청년독립단을 구성하고 이광수가 문안을 작성하여 600여회원의 환호 속에 발표되었다.
"전 조선 청년 독립단은 우리 2천만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를 쟁취한 세계 모든 나라 앞에 독립을 성취할 것을 선언한다."로 시작되는 선언문은 일제 침략 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을 규탄하였다.
또한, 미국과 영국이 일제의 조선침략을 승인한 것과 일본의 10년간의 식민 통치를 비판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제시하였다.
이 선언문은 일문,영문으로 인쇄되어 우편으로 동경 주재 각국 대사관, 공사관, 조선총독 및 각 신문사로 보내졌고, 이로써 한국은 4,300여 년의 유규한 역사를 가진 자주 독립국임을 강조하고 일제가 식민통치를 계속한다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투쟁할 것이며 독립 후에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모범을 따라서 신 국가를 건설하고 반드시 세계평화에 공헌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비록 행사는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10명의 실행 위원을 포함한 27명의 유학생이 검거되었지만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2.8독립선언문이 오늘날 재평가받아야 하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 들면 첫째는 젊은 유학생이 주축이 되어 작성된 만큼 어조가 강경하고 단호하다는 것과 그 사상이 진보적이라는 데 있고 둘째는 당시 재일 유학생들이 법.정치.경제 등을 전공한 인재들이라 훗날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조국을 잃은 설움에도 실의에 빠지지 않고 독립을 위해 투쟁한 젊은 학생들의 혈기가 대한민국 독립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날의 선언은 특히 청년 실업률이 15.4%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 용기를 준다는것에서 더욱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 잃은 슬픔도 이겨냈는데 이런 어려움쯤이야 툭툭 털어내고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보훈과 강유정
최근수정일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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