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신 시장님 누가 이분을 피눈물 흘리게 했습니까.
작성자 ***
작성일13.11.11
조회수1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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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은동 재방에 앉아 새만금 공사 현장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재방 경사로 밭에서 돌
을 고르고 계시던 어르신 한분이 다리를 좀 저시며 다가오신다. 어르신은 새만금 현장을 보
는 나의 표정에서 뭔가를 공유하는 바가 있는지 ‘예전에 학생 때 오셨었냐’고 물으신다. ‘갯
벌이 방조제로 막히기 전부터 자주 왔다 갔다 했다.’고 말씀드리니, 옆에 앉아서 회한을 털
어 놓으신다.
“그때는 물이 여기까지 넘쳐 도로까지 출렁거렸어요.”
그랬다. 과거에 마을 주민들은 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어느 때곤 드넓은 강과 바다의
조우를 볼 수 있었고 눈을 감으면 갯벌의 비릿하지만 신선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하지
만 지금은 공사장 펜스가 흉물스럽게 마을을 두르고 있고, 간간히 그 너머로 중장비들의 소
리와 먼지만이 넘어올 뿐이다.
[어은동 마을에서 바다 쪽으로 보이는 광경]
“황금어장였지. 나가면 돈 였어요. 어떻게 해도 한번 나가면 7,8만원 값은 잡았지요.”
하지만 바다가 막힌 후에 상태가 말이 아니란다. 어르신은 이곳 어은동의 95%는 새만금 사
업으로 형편이 더 어려워졌고 앞으로 먹고살 길이 막막해 졌다며 한탄하신다.
“보상금이라고 나온 돈도 수협에 융자 갚기도 힘든 수준예요.”
그러며 새만금 사업추진의 바람몰이를 해댔던 강현욱 전북도지사 등의 사탕발림에 속아 새
만금 추진 결의대회 등에 참여 했던 것에 깊은 한숨을 쉬셨다.
그런데 어르신은 왠지 내 얼굴이 낯이 익단다. 나 역시 어르신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각각
새만금을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활동을 하던 사람으로서 그 충돌 현장 어디선가 우리는 서로
마주대하고 있었던 듯 했다. 하지만 10년의 세월은 구체적 경험을 증발시키고 다만 서로에
대한 어렴풋한 인상만 남겨둔 체로, 이렇게 나란히 앉아 흙먼지만 날리는 갯벌에 대한 아픔
을 함께 공유하게 만들고 있었다.
“연안의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피부로 느끼는데, 도심 안쪽에 있는 사람들은 이 실태를
전혀 몰라. 새만금 사업으로 몇몇 가진 사람들만 떼돈을 벌지 이게 뭔 서민에게 도움을 준
단 말이야.”
국책사업이 그렇게 서민들의 생계의 터전을 파괴하고 지역공동체를 파괴하는 현실에 대한
토로가 서로 오갔다. “그럼 더 이상의 고기잡이가 불가능한 어촌계는 해산되었나요?” 그리
물으니 어르신은 고개를 저으신다.
“아니. 아직 어촌계는 있어요. 계원이 아직 64명이 남아 있어. 뭐 말만 어촌계지. 예전에는
어촌계에 기본적으로 수천만 원씩의 여유자금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 푼도 없어요. 뭐 잡아
오는 고기가 있어야지.”
유명무실해진 어촌계의 간판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상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컸기 때문이리라. 공사장 펜스 너머로 소음과 함께 밀려오는 먼지바람의 불쾌함은 그나마
마지막 자존심이 되어 붙어있는 어촌계 간판을 통해 조금의 위안이 될 것이다. 불과 7,8년
전까지 떠들썩한 번영을 구가하던 마을의 풍요로움은 그 속에 함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
여 이들은 강한 여운이 남는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계손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더 이상 고기 한 마리 잡을 수 없는’ 어촌계 공동체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촌계 간판]
어르신은 회한 가득한 표정으로 바지를 걷어 올려 보이신다.
“제가 월남참전 전우회 소속인데...”(앗 그렇다. 과거에 이 단체와 몇 차례 엎치락뒤치락 했
던 기억이 떠오른다.)
“제가 월남참전 전우회 소속인데. 부상당해서 무릎을 이렇게 수술했어요.”(10여cm의 길쭉
하고 섬뜩한 칼 자욱이 무릎위로 나 있었다.)
“그래서 무릎이 아픈데, 이렇게 뚝방 경사로 오르락내리락 거리면서 생전 안 해보던 농사를
지으려니 힘들어요.”
그러고 보니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얘기를 나누던 이곳 뚝방 길은 수풀이 우거졌
었다. 고기잡이에 바쁜 마을 주민들이 이 길을 거의 다닐 이유가 없어서 잡초가 머리 높이
로 자랐었다. 그런데 뚝방과 경사로, 그리고 아래쪽 배수로 주변 평지가 깔끔히 정리되어
탁 트인 공간이 되었다. 새만금 사업으로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된 어민들이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서 그간 버려졌던 땅을 밭으로 일군 것이다. 하지만 농사일도 서툰데다가 토질도
좋지 않아서 애로가 많은 듯싶었다.
“이번에 심은 콩도 다 죽었어...”
[토질이 안 좋은 뚝방 경사로에 콩을 심었다가 잘 안되서 그 줄기를 목을 친 흔적들이 흉측
하게 드러나 보인다.]
그렇게 20여 분간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어르신은 마음에 맺힌 회한을 그렇게라도 풀고
싶었던 듯 했다. 그 당시는 잘 몰랐으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고마웠었던... ‘그 당시 새만금
갯벌을 살리자고 이곳을 한 번씩 찾은 젊은이’에게 작은 위로를 받고 싶으셨던 듯 했다.
일상에 지친 얼굴이 역력한, 삶에 재미를 못 느끼시는 그 어르신이 이야기 도중에 유난히
생기가 돌고 말에 힘이 실렸었던 적이 있었다.
“그땐 뭐. 생합, 조개, 준어, 갈치가 올라와... 산란기 때 민물과 짠물이 만나니까 새끼 까려
올라오고, 삼치, 멸치, 얕아도 무지하게 고기가 많았어요. 고기반절 물 반절. 이 앞이 그런
어장이었는데....”
60이 되는 나이에 시작 해 아직 서툰 농사일이 적응이 안 된다는 전직 어부의 회한과 시름
은 싸늘해지는 가을과 함께 그렇게 더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친 후에 다리를 절
면서 돌아가는 어르신의 그림자가 그의 경사지고 토질이 엉망인 뚝방 밭에 드리워진다.
http://cafe.daum.net/my80go
* 새만금 갯벌은 단순한 생산효과뿐만 아니라 만경강, 동진강 똥물을 ‘정화하는 기능’까지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갯벌이 사라짐으로 중금속에 오염된 물들이 외해로 퍼져나감으로 앞으로 (지금도 그렇지만) 점차 외해 어장에 막대한 피해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우리가 먹는 어패류들이 중금속에 오염된 것일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 특히나 새만금 방조제가 없던 상화에서도 흐르는 강물이 농업용수의 역할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었는데, 새만금 방조제로 강물이 막힌 상황에서 앞으로 ‘농업용수’ 더군다나 ‘공업용수’로 새만금 호소의 물을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라 결국 궁극의 실패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의 의견이다.
* 이 사업은 원래, 환경부와 해양수산부가 반대했었다. 해양수산부 산하의 해양연구소에서도 우리 나라 갯벌의 가치가 농경지보다 3.3배 높다고 평가했고, 네이처지에서도 중금속 정화효과까지를 고려하면 일반 농지보다 250배 높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농림부의 입장에서 ‘갯벌’은 자신들의 관할 부지도 아녔고, 소유 할 수도 없었기에, 정치인들, 건설업자들과 어울려 그 갯벌을 ‘농경지’로 만들 전략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에 ‘농업기반공사’가 앞장서서 모든 잡무를 처리했다. 그들은 사업타당성을 사기적으로 부풀리고, 각종, 왜곡-선동-이간질 전략을 통해서 결국 새만금 사업의 추진을 본격화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농업기반 공사의 사장 출신인 사람이 ‘새만금의 희망’을 떠벌려 군산시장이 되었다. 재선까지 되었다. 그로 인해서 아무런 득은 없고, 피해만 가중되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에 대한 지지를 아까지 않고 있다. 이런 지역이 망할 수밖에 없음은 이미 2천 년 전에 쓰인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 다뤄져 있다. 진실을 향한 눈과 귀를 닫고 끝모르는 욕망에만 빠져 있는 이들은 그 대가를 치루 게 될 것이다.
을 고르고 계시던 어르신 한분이 다리를 좀 저시며 다가오신다. 어르신은 새만금 현장을 보
는 나의 표정에서 뭔가를 공유하는 바가 있는지 ‘예전에 학생 때 오셨었냐’고 물으신다. ‘갯
벌이 방조제로 막히기 전부터 자주 왔다 갔다 했다.’고 말씀드리니, 옆에 앉아서 회한을 털
어 놓으신다.
“그때는 물이 여기까지 넘쳐 도로까지 출렁거렸어요.”
그랬다. 과거에 마을 주민들은 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어느 때곤 드넓은 강과 바다의
조우를 볼 수 있었고 눈을 감으면 갯벌의 비릿하지만 신선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하지
만 지금은 공사장 펜스가 흉물스럽게 마을을 두르고 있고, 간간히 그 너머로 중장비들의 소
리와 먼지만이 넘어올 뿐이다.
[어은동 마을에서 바다 쪽으로 보이는 광경]
“황금어장였지. 나가면 돈 였어요. 어떻게 해도 한번 나가면 7,8만원 값은 잡았지요.”
하지만 바다가 막힌 후에 상태가 말이 아니란다. 어르신은 이곳 어은동의 95%는 새만금 사
업으로 형편이 더 어려워졌고 앞으로 먹고살 길이 막막해 졌다며 한탄하신다.
“보상금이라고 나온 돈도 수협에 융자 갚기도 힘든 수준예요.”
그러며 새만금 사업추진의 바람몰이를 해댔던 강현욱 전북도지사 등의 사탕발림에 속아 새
만금 추진 결의대회 등에 참여 했던 것에 깊은 한숨을 쉬셨다.
그런데 어르신은 왠지 내 얼굴이 낯이 익단다. 나 역시 어르신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각각
새만금을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활동을 하던 사람으로서 그 충돌 현장 어디선가 우리는 서로
마주대하고 있었던 듯 했다. 하지만 10년의 세월은 구체적 경험을 증발시키고 다만 서로에
대한 어렴풋한 인상만 남겨둔 체로, 이렇게 나란히 앉아 흙먼지만 날리는 갯벌에 대한 아픔
을 함께 공유하게 만들고 있었다.
“연안의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피부로 느끼는데, 도심 안쪽에 있는 사람들은 이 실태를
전혀 몰라. 새만금 사업으로 몇몇 가진 사람들만 떼돈을 벌지 이게 뭔 서민에게 도움을 준
단 말이야.”
국책사업이 그렇게 서민들의 생계의 터전을 파괴하고 지역공동체를 파괴하는 현실에 대한
토로가 서로 오갔다. “그럼 더 이상의 고기잡이가 불가능한 어촌계는 해산되었나요?” 그리
물으니 어르신은 고개를 저으신다.
“아니. 아직 어촌계는 있어요. 계원이 아직 64명이 남아 있어. 뭐 말만 어촌계지. 예전에는
어촌계에 기본적으로 수천만 원씩의 여유자금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 푼도 없어요. 뭐 잡아
오는 고기가 있어야지.”
유명무실해진 어촌계의 간판을 내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상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컸기 때문이리라. 공사장 펜스 너머로 소음과 함께 밀려오는 먼지바람의 불쾌함은 그나마
마지막 자존심이 되어 붙어있는 어촌계 간판을 통해 조금의 위안이 될 것이다. 불과 7,8년
전까지 떠들썩한 번영을 구가하던 마을의 풍요로움은 그 속에 함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
여 이들은 강한 여운이 남는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계손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더 이상 고기 한 마리 잡을 수 없는’ 어촌계 공동체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촌계 간판]
어르신은 회한 가득한 표정으로 바지를 걷어 올려 보이신다.
“제가 월남참전 전우회 소속인데...”(앗 그렇다. 과거에 이 단체와 몇 차례 엎치락뒤치락 했
던 기억이 떠오른다.)
“제가 월남참전 전우회 소속인데. 부상당해서 무릎을 이렇게 수술했어요.”(10여cm의 길쭉
하고 섬뜩한 칼 자욱이 무릎위로 나 있었다.)
“그래서 무릎이 아픈데, 이렇게 뚝방 경사로 오르락내리락 거리면서 생전 안 해보던 농사를
지으려니 힘들어요.”
그러고 보니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얘기를 나누던 이곳 뚝방 길은 수풀이 우거졌
었다. 고기잡이에 바쁜 마을 주민들이 이 길을 거의 다닐 이유가 없어서 잡초가 머리 높이
로 자랐었다. 그런데 뚝방과 경사로, 그리고 아래쪽 배수로 주변 평지가 깔끔히 정리되어
탁 트인 공간이 되었다. 새만금 사업으로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된 어민들이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서 그간 버려졌던 땅을 밭으로 일군 것이다. 하지만 농사일도 서툰데다가 토질도
좋지 않아서 애로가 많은 듯싶었다.
“이번에 심은 콩도 다 죽었어...”
[토질이 안 좋은 뚝방 경사로에 콩을 심었다가 잘 안되서 그 줄기를 목을 친 흔적들이 흉측
하게 드러나 보인다.]
그렇게 20여 분간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어르신은 마음에 맺힌 회한을 그렇게라도 풀고
싶었던 듯 했다. 그 당시는 잘 몰랐으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고마웠었던... ‘그 당시 새만금
갯벌을 살리자고 이곳을 한 번씩 찾은 젊은이’에게 작은 위로를 받고 싶으셨던 듯 했다.
일상에 지친 얼굴이 역력한, 삶에 재미를 못 느끼시는 그 어르신이 이야기 도중에 유난히
생기가 돌고 말에 힘이 실렸었던 적이 있었다.
“그땐 뭐. 생합, 조개, 준어, 갈치가 올라와... 산란기 때 민물과 짠물이 만나니까 새끼 까려
올라오고, 삼치, 멸치, 얕아도 무지하게 고기가 많았어요. 고기반절 물 반절. 이 앞이 그런
어장이었는데....”
60이 되는 나이에 시작 해 아직 서툰 농사일이 적응이 안 된다는 전직 어부의 회한과 시름
은 싸늘해지는 가을과 함께 그렇게 더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친 후에 다리를 절
면서 돌아가는 어르신의 그림자가 그의 경사지고 토질이 엉망인 뚝방 밭에 드리워진다.
http://cafe.daum.net/my80go
* 새만금 갯벌은 단순한 생산효과뿐만 아니라 만경강, 동진강 똥물을 ‘정화하는 기능’까지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갯벌이 사라짐으로 중금속에 오염된 물들이 외해로 퍼져나감으로 앞으로 (지금도 그렇지만) 점차 외해 어장에 막대한 피해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우리가 먹는 어패류들이 중금속에 오염된 것일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 특히나 새만금 방조제가 없던 상화에서도 흐르는 강물이 농업용수의 역할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었는데, 새만금 방조제로 강물이 막힌 상황에서 앞으로 ‘농업용수’ 더군다나 ‘공업용수’로 새만금 호소의 물을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라 결국 궁극의 실패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의 의견이다.
* 이 사업은 원래, 환경부와 해양수산부가 반대했었다. 해양수산부 산하의 해양연구소에서도 우리 나라 갯벌의 가치가 농경지보다 3.3배 높다고 평가했고, 네이처지에서도 중금속 정화효과까지를 고려하면 일반 농지보다 250배 높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농림부의 입장에서 ‘갯벌’은 자신들의 관할 부지도 아녔고, 소유 할 수도 없었기에, 정치인들, 건설업자들과 어울려 그 갯벌을 ‘농경지’로 만들 전략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에 ‘농업기반공사’가 앞장서서 모든 잡무를 처리했다. 그들은 사업타당성을 사기적으로 부풀리고, 각종, 왜곡-선동-이간질 전략을 통해서 결국 새만금 사업의 추진을 본격화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농업기반 공사의 사장 출신인 사람이 ‘새만금의 희망’을 떠벌려 군산시장이 되었다. 재선까지 되었다. 그로 인해서 아무런 득은 없고, 피해만 가중되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에 대한 지지를 아까지 않고 있다. 이런 지역이 망할 수밖에 없음은 이미 2천 년 전에 쓰인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 다뤄져 있다. 진실을 향한 눈과 귀를 닫고 끝모르는 욕망에만 빠져 있는 이들은 그 대가를 치루 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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