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시립교향악단
작성일19.06.10
조회수1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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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서곡
이 오페라는 18세기의 프랑스 극작가 보마르셰가 쓴 희곡을 다폰테라는 사람이 고치면서 동시에 모차르트가 계속 음악을 붙여 가며 6주만에 모두 완료한 음악이다. 이 곡의 초연은 1786년 빈의 부르크라는 극장에서 황제까지 참석하여 거행됐지만 이렇게 상연되 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 까닭은 보마르셰의 원작이 프랑스 혁명 전야의 부패하고 타락한 지배층을 통렬하게 비판, 조소하는 내용의 희곡이어서, 본국 프랑스는 물론이고 빈에서도 기피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의 오페라가 그대로 상연될 수 있었던 것은 다폰테의 뛰어난 솜씨와 정치적 역량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삭제하고 재치 있게 대 본을 만들어 황제의 허가를 얻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희곡은 얼마후 일어나는 프랑 스 혁명의 도화선 중 하나가 되는 역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오페라의 배경은 보마르셰가 쓰고 로시니가 작곡한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같은 17세기 스 페인의 알마비바 백작의 집이다. 바람둥이 백작 알마비바와 로지나라는 소녀가 재치 있는 이발사 피가로의 힘을 빌어 결혼을 한다는 내용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속편 격인 이 [피가로의 결 혼]은 백작의 시종이 된 피가로와 하녀 스잔나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이다. 방탕한 백작이 스잔나에게 마음이 쏠리게 되고 첫날밤이라도 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초야권'이 라는 옛날 관습을 부활시키고 이로 인해 여러 문제들이 일어난다. 스잔나를 유혹하려는 백작과, 백작 부인을 스잔나 대신에라도 유혹하려는 피가로를 보다 못한 백작 부인과 스잔나는 꾀를 내고 결국은 두 어리석은 남자들로부터 사과를 받고 용서해 준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이다. 오페라의 기분을 잘 표현해서 단독으로 연주를 자주 하는 서곡은 프레스토, 4/4 박자로 소나타 형식이다. 그 뒤에는 4개의 막으로 나뉘는데 배경은 주로 백작의 집이 된다. 이 오페라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생동감에 넘치고 매력적이다. 특히 스잔나는 서민적인 매 력을 지닌 캐릭터로 모차르트가 그의 아내 콘스탄체의 처녀 시절의 모습을 그리며 작곡했다는 이 야기가 있다. 이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모차르트가 22세 때 사랑 에 빠졌던 일로지아라는 아가씨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고, 그녀 의 동생인 콘스탄체가 상심한 모차르트를 위로해 준 계기로 둘은 서로에게 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와 누이는 이들의 결혼을 반대했고,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고 결혼한 커플 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다. 콘스탄체가 무능하고 사 치스러운 주부여서 모차르트가 요절을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그가 결혼 생활 을 하는 동안 명곡을 많이 쓴 것을 보아 그녀가 소크라테스의 악처처럼 모차르트의 창작의 원동 력이 아니었나 하는 이야기도 있다. 모차르트의 4대 오페라는 모두 한결같이 음악이란 얼마나 강력하게 극적 형식을 만들 수 있는가 를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피가로의 결혼≫과 ≪마술 피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와 같은 극적인 형식이 얼마나 감동적인 표현 도구인가를 웅변해 주는 것이다. 모차 르트의 '드라마로서의 오페라'형식의 완성은 그가 우리에게 남겨 준 또 하나의 값진 유산이라 하겠다
생상 론도 카프리치오
1868년에 완성되어 4년후에 독주로 파리에서 초연된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는 "찌고이네르바이젠"의 작곡가 사라사테의 연주를 보고 이 바이올린의 명수에 완전히 매료되어 사라사테를 위해 작곡해서 헌정한 곡입니다. 사라사테풍의 화려한 바이올린의 기교가 짙게 깔려있을 뿐 아니라 생상의 작풍인 프랑스적 우아한 정서로 가득차 있는 이곡은 오늘날 에도 명연주자가 연주회에서 즐겨 연주하는 곡이다. 아주 화려하고도 고도의 테크닉을 필요로 하는 곡입니다.생상은 감정적인 것을 무척 혐오했는데, 이 시대는 감정의 폭풍이 이는 낭만주의로 질풍노도의 시대로 일컬어졌던 만큼 격렬한 감정과 폭발적인 열정의 소유자 인 독일의 바그너 (Richard Wagner, 1813-1883)가 그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독일의 낭만주의는 프랑스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생상은 감정과잉과 극도의 사실성에 빠진 당시의 독일 낭만주의에 대항해서 본래의 특질을 갖춘 밝고 맑은 음악을 표방하면서 세자르 프랑크(Cesar Franck),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e) 등과 함께 참다운 프랑스 음악을 소개하고 발전시키려 활약합니다.
170여곡의 많은 작품을 작곡한 생상은 그의 음악적인 공적으로 프랑스의 레종 도뇌르 훈장 중에서도 가장 영예 로운 '그랑 클로아'를 받았고, 케임브리지 대학으로부터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나 개인적으로는 별로 행복한 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40세에 결혼한 19세의 신부와 어머니의 불화로 괴로워하던 생상은 결혼 6주년을 기념하여 부인과 휴가를 즐기던 중 스스로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객지를 방황하다가 결국 알제리의 어느 호텔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의 시종만이 그의 곁에서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이 곡은 형식적인 면에서 아주 독창적인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론도'이긴 하나 규칙은 작곡가 마음대로 변형됩니다. 처음의 서주는 멜랑콜리가 가미된 안단테로 스페인의 향취가 물씬나고 론도는 지극히 리드미칼하지만 찰라적인 우수가 섞이면서 듣는 이의 마음을 저리게 하며, 후반의 카덴자는 더없이 화려합니다. 오케스트라의 강렬한 화음, 힘찬 행진곡풍, 율동적이면서 호쾌한 선율 등은 많은 바이올린 독주곡 중에서 이 곡이 가장 널리 연주되는 곡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유입니다. 서주부는 안단테, a단조, 2/4박자. pp의 현의 으뜸화음 위에 독주가 고요히 정열을 담고 들어온다. 나중에 현의 피지카토상의 독주의 모속 진행에서 음계적 움직임을 거쳐서 ?의 트릴로 힘차게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6/8박자의 주부로 들어간다. 론도의 주요 주제는 순차 하강하여 가는 특징 있는 것으로, 한편 pp로 독주에 의하여 제시되는 부주제는 트릴을 주체로 한다. 독주에 화려한 패시지가 이 뒤를 잇고, 반음계로 상승하여 주요 주제를 반복하면 투티가 새로운 주제를 보인다. 이것을 독주가 받아 약간 서정적인 부분을 거쳐, 다시 반음계로 하강하고 또다시 상행하면 주요 주제가 되돌아온다. 이 후 투티에 의한 주제가 이어지고 다음에 트릴 주제가 온다. 독주 바이올린의 분산 화음 위를 관악기가 순차 주요 주제로 더해지는 부분부터 독주의 3중음이 카덴짜풍의 역할을 다하여 코다로 들어가서 피우 알레그로, A장조의 어지러운 움직임으로 고조된 다음 종곡이 된다.
브람스 교향곡 2번
1876년, 오랜 시간 다듬어 발표한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은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당대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베토벤의 제10교향곡’이라 격찬했다. 브람스는 자신감이 생겼는지 이듬해인 1877년 6월 오스트리아 남부 휴양도시 페르차하에 머물며 두 번째 교향곡의 작곡에 착수했다. 남부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산들이 둘러싼 이 마을을 마음에 들어한 브람스는 그 후 2년 동안 이곳으로 휴양을 왔다. 페르차하의 좋은 환경, 그리고 [교향곡 1번]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가 새로운 교향곡의 작곡을 재촉했다. 그래서인지 [교향곡 1번]과 달리 두 번째 교향곡 작곡의 진도는 상당히 빨리 진행되었다. 그 해 9월 경, 클라라 슈만은 지휘자 헤르만 레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새로운 교향곡에 대해 언급하며 “1악장은 완성되었다”고 적고 있다. 10월 3일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이 1악장 외에 4악장의 일부도 피아노로 연주해 들려주었고, 이 후 2악장, 3악장을 포함한 전곡이 완성되었다. 즉, 작곡 순서는 1악장, 4악장, 그 후 중간의 두 개 악장이다. 11월 브람스는 [교향곡 2번]의 네 손을 위한 피아노용 편곡에 힘써서 12월에는 친구인 외과의사 테오도르 빌로트와 함께 연주했으며, 자필 초고를 클라라 슈만에게 선물했다고 전해진다. [교향곡 2번]의 정식 초연은 1877년 12월 9일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파트 악보를 사보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오케스트라의 연습시간이 충분치가 못했기 때문에 초연은 부득이 12월 30일로 연기되었다. 초연 당일, 빈 무지크페라인 잘에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한스 리히터의 악보는 브람스가 손으로 쓴 초고였다. 아직 악보가 인쇄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브람스는 평론가 에두아르 한슬릭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교향곡 2번]에 대해 “밝고 사랑스러운 곡”이라고 표현했다. 빈 사람들의 기질에도 맞았던 이 곡의 초연은 3악장을 반복해서 연주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브람스를 무대로 불러내는 커튼콜이 오랫동안 멈추지 않았다 한다. 라이프치히에서는 반응의 온도차가 있었다. [교향곡 1번]같은 장중한 분위기와 깊이를 기대했던 청중들의 반응은 그리 뜨겁지 못했다. 금관악기의 잦은 실수도 한 요인이었다. 이후 암스테르담, 덴 하그, 드레스덴, 뒤셀도르프에서 연주될 때까지도 이 곡의 인쇄악보는 아직 사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교향곡 2번]의 총보와 네 손을 위한 피아노용 편곡 악보는 1878년 8월 짐로크사에서 출판되었다. 출판 직전의 여름까지 연주가 끝난 뒤 브람스는 오케스트라용과 4손 피아노용 악보를 정정하는 작업을 했었다. 인쇄된 악보를 가지고 브람스는 1878년 9월 이 곡을 고향인 함부르크에서 연주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지만,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은 [교향곡 1번]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우선 [교향곡 1번]에 있는 복잡함과 큰 규모는 찾아볼 수 없다. [교향곡 2번]에는 밝고 아름다운 페르차하와 조용하고 온화한 빈 근교의 리히덴탈에서 보낸 브람스의 여유로운 생활이 묻어난다. [교향곡 1번]에서 표방했던 ‘암흑에서 광명으로’나 ‘고뇌 뒤의 환희’같은 전체 곡상의 추이를 2번에서는 분명히 내세우지 않았다. 부드럽고 온화한 인간적인 따스함과 즐거움, 그리고 눈부신 자연의 밝은 숨결 때문에 이 곡을 두고 ‘브람스의 전원 교향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낭만주의 음악에서 자연을 상징하는 요소들인 호른 소리, 새 소리와 같은 플루트나 클라리넷 음이 풍성한 화음 속에 나타난다. 브람스의 친구인 외과의사 테오도르 빌로트는 이 곡을 듣고 브람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행복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작품 전체에 넘치고 있네. 그대의 완벽주의가 나타나 있고, 맑은 생각과 따스한 감정이 무리 없이 흐르고 있었지. 페르차하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 브람스가 휴양지 페르차하에서 작곡한 곡으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1번] 등이 있는데, 두 곡 모두 [교향곡 2번]과 유사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게다가 [바이올린 협주곡]은 [교향곡 2번]의 마지막 악장에 사용하려고 했던 주제를 재료로 활용해 작곡했다. 또한 1악장에서 렌틀러나 왈츠의 분위기가 나타는데 이 때문에 [교향곡 2번]을 총 4곡의 브람스 교향곡 가운데 가장 빈(Wien)풍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납득이 가는 말이다. 분명히 양식과 성격이 다르고, 곡에서 풍기는 분위기도 대조적이지만, 노작이었던 [교향곡 1번]과 비교해보아도 결코 처지지 않는 걸작이 바로 [교향곡 2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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