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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미도 앞바다 의 유물들의 신비와 장보고
작성자 ***
작성일07.06.10
조회수1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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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방에서 새만금사업으로 인해 해류 조수이동으로 해저 유물선이 발견되고 있다 지금도 수많은 해저 유물들이 나올 것 이라는 기대 속에 필자는 베일에 가려진 야미도 앞 해상보물선의 자태와 장보고의 연계성에 대하여 그 중요성을 학계에서 밝혀지기를 기대하면서, 야미도 해상 유물과 해상 왕 장보고와 의 관계를 한번 집고 넘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얼마 전 부터 선유도 앞바다에 숨겨진 1200여년의 신비를 바라보고 많은 의문점을 생각해 보았다,
그중에 낭중일기에서 이순신장군이 선유도에서 10여일이나 머물면서 조정에 전황에 대한 상소문 작성했다는 자료와 648년 당태종과 신라의 김춘추와 나당군사 동맹을 체결된 이후 나당 간에 원활한 교통을 위해서 연안 항로보다는 횡단 항로가 위험도가 줄어든다는 계산아래 새로운 항로를 횡단 항로로 개척한바 있다 따라서 장보고와 발견된 유물선이 상당히 가까운 관계가 있다고 보고 역사적 배경과 그 의미를 바탕으로 정당한 의미를 찾아내야한다고 생각 한다,장보고는 서남해안 영산강이 개입된 화원반도와 무안반도 사이의 영산강 하구언과 한강을 이용하여 해상통로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금강하구와 백제 사비성 을 잊는 해상에도 장보고가 수는 해 아 릴 수 는 없지만 다녀갔다고 본다, 또한 유학자 최치원선생께서도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시거나 과거시험을 치루러 가실 때에 장보고를 통해서 기 벌 포 에 들어오는 상선을 이용 하셨을 것이라는 추측이 간다, 한조각의유물도 그 의미를 많이 부여하면 크다고 본 다, 그러나 다량의 유물들이 건저지고 있다, 여기에 따라서 우리 지방에서도 이 에 대한 연구 자료를 확보해서 후세에게 이지역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줘야 한 다고 본 다.
장보고가 실어 나르던 고려자기의 항로는 이제 서서히 군산과 어청도 사이의 항로를 택했던 사실이 있음을 한국사의 미아 해상 왕 장보고의 진실(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강 봉룡 교수) 연구 저서에서 자료로 드러나 있다. 역사를 연구하는 우리는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소중한 자료를 그냥 지나치지만 일본학자들의 경우 우리나라 김치 맛 하나 를 연구하기 위해서 전국을 혼자서 누비고 다니면서 자료를 조사해간다 .이때에 우리는 숨겨진 맛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친절하고 자상하게 안내를 하고 그 비법 까지 알려주고 전수해주어 얼마 후 에는 일본에서 우리보다 더 좋은 김치를 담가서 세계시장에 내어 놓는다
7세기에 신라의 해양진출은 고구려 와. 백제의 견제를 받고 연안항로를 포기하고 새로운 황해 중부항로를 개척하여 당나라와 연결을 시도함으로써 외교적 고립상태를 벗어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횡단항로는 중국의 산동 반도에서 황해를 가로질러 장보고는 드디어 횡단항로를 통한 대규모 군사작전이 660년에 감행되었다.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대군이 산동 반도 성산을 출발. 황해를 횡단하여 덕 물 도(오늘날 덕적도)에 이르러 잠시 머물다 가. 이를 발판으로 금강하구에 진입한 것이다.
소정방군의 금강하구진입 작전의성공은 결정적 판세의 전환 를 가져왔으며 ,결국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횡단 항로의 위력은 여지없이 발휘 되었고 .횡단 항로에서 산동 반도 성산과 금강 하구의 중요성이 새로이 대두된 셈이다,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이 만나는 새만금 앞바다의 중요성은 삼국통일전쟁 과정에서 잇따라 입증 되었다. 먼저 백제사비성 함락 후 에 백제 부흥세력이 그와 동맹관계에 있던 왜 지원군과 함께 동진강 하구에서 나당 연합군과 국운을 건 일대 격전을 벌렸는데 .
이는 새만금 앞바다가 얼마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는가를 다 시 한번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이곳이 결정적 승부처이기에 더 중요했다, 금강하구의 기 벌 포 에 상륙하려던 산동 반도-황해-덕적도-기 벌 포 코스가 개설된 자료를 앞서 말 한데로 확인 할 수 있다, 우리지역에서 가마터가 발견되지는 안 했지만 식량 등 .도자기와 바꿔서 생활했을 것이라는 추축과 고려왕조와 우리 지방의 우호적 관계 그리고 왕건을 도와 고려 왕조를 건설한 주도세력이 금강 변에서 참여 한 점 .최치원과 장보고의 만남이 있었다고 보고 한국 해양의 영웅 장보고와 이순신장군과 최치원의 그 시대에 관한 역사를 연구해나가는 일이 지금이라도 해내야 할일이 아닌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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