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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재간이좋은 오토바이 할아버지 채금석
작성자 ***
작성일08.05.10
조회수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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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재간이좋은 오토바이 할아버지 채금석 _축구의 고장, 내가 사는 우리 군산에는 축구를, 좋아하는 팬들이 없는 것 일까‘ 금년에 17번째로 맞이하는 금 석 배 축구를 보면서, 느낀 이야기를 여기에 해 보고 저 한다, 필자가 만나본,
채 금석 옹은 누구일까, 이분은 1904년 4, 9일 구 암동 에서 출생 하셨다 < 1904, 4 ,9-1995, 12, 26일>, 1930년 경신중학교 축구팀에서, 전 대회를 석권이라는 신화를 남기셨다. 1933년 제2회 경-평 축구 대회 때부터 11번을 달고,
왼쪽사이드 어 태 커 로 출전해, 1944년 해방 전까지 ,고 김 용식(1910~1985) 선생님등과 함께 호흡을 맞춰, 명성을 날리셨다고 한 다, 이때 단짝이자 당대의 맞수였던, 김 용식 선생과 술, 담 배, 도박, 잡기, 여자만을 멀리하고 ,40세까지 선수로 란 약속을 임종 시 까지 지켰을 만큼,
축구를 위해 청교도적 생활을 했다,당시 경신중은 선수로, 골키퍼 이 혜 봉 .센터하프 임 창 제 우람한 몸집의 차 준 복 . 김 용식 등 이 수비를 맡아 철벽수비를 이루었고 .공격진에는 레프트 윙의 채 금 석, 레프트 이너의 최 성 손 , 센터포드 김 영 근과 그밖에 김 성 태 등이 포진하고 있어서,
막강한 공격력을 갖추고 있 었 다, 1929년 광주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제 항거인 광주학생 사건으로 연류 되어, 퇴학을 당 하는 바람에, 경신중학교 축구팀이 해체되고, 축구팀은 막을 내렸다, 그전부터 나는 이분의 명성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 고장이 낳은 채 금석 선생님은, 노구를 이끌고,
평소에는 새벽마다, 군산 제일고등학교 운동장에 일찍 나오셔서, 손자처럼 어린아이들이 공을 차는 모습을, 지팡이 에, 몸을 가누시면서 보 시 고 ,계셨던, 1990년 가을이었다. 야 이리와 봐라, 이렇게 한번 차 봐라 , 하시고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아이들은 신이나서 할아버지 앞에서는 헛발질를 하면 야 야 이놈아 ! 그러면 안되지 이렇게 차봐라! , 그러니까 군 산 시 와 옥 구 군이 행정구역 합병이 되기 전이 었 다. 선생님을 늘 존경하면서, 축구 제자로 따라 다니던, 황 홍 근 형님을 따라서 이분을 직접 만나본건,
구 암 동 260-1번지의 조그마한 자택이었고 .이분의 명성보다는 검소하고, 조그마한 집에서 살고 계셨다, 몸이 불편하여, 거동이 불편하신 ,상태로 뵙게 되었고 .그러니까 올해로 전 국초, 중, 고등학교 금석배가 17회 이니까, 이분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2년 전쯤 이었다 ,
이때만 해도 당신의 제자들이, 지금도 잘 알려진,유명한 최 재모 선수 등이, 여러 곳에서 활약을 하였고 . 그들의 활동이 왕성하던 때 이다. 그리고 88서울 올림픽이 끝나서 , 축구열기가 식어 있지 않았던 시절 이 었 다 .
선생님께서는 1934년 독일 백 림 올림픽 예선전에 군산의 오토바이라 하는 별명으로 한국 대표로 출전하시고. 이 예선전을 끝으로 국가대표를 마치시고 1935년 이후에는 고향에 돌아와 53세까지 전북 일 반 부 대표로 전국체전에 출전 하실 정도로 축구를 좋아 하셨다.
그날 구 암 동 안방에서 큰 절을 올리는, 홍 근 형의 모습을 보면서, 1933년경 경 평 전 주전멤버로 오토바이 라는 별명이 있던 , 빠른 발과 발재간이 좋은 분 치고는 ,너무 체구가 적어 보였으나. 탄탄한 모습의 초라해진, 노후를 보내시는구나 생각도 했다
.경 평 축구는 1929년 10월8일 조선일보사 주최로, 휘 문 고보 운동장에서, 경성(서울)과 평양 팀이 친선경기를 가지면서, 시작된 경기로, 경성과 평양을 오가며, 치러진 이 대회는 1931년~1932년 중단되었다가 .1933년 조선축구 협회(대한축구협회) 와 경성~ 평양 축구단이 창단되면서 본궤도에, 올랐고
1946년 서울대회로 명맥이 끊겼으나. 1933년에 창단된 대한축구 협회가 인정한, 우리 금석배의 위상이 이렇게 대단한 것이라는 걸, 잘알 수 있다, 그래서 금년 17회 대회에도, 명예 대회장에 정 몽준 회장이 참여하고, 고문과 자문위원 대회장등 임원으로, 구성 하고 있다,
그 당시 경 평전은. 모두 21번 싸운 양 팀의 전적은, 평양이 9승7무5패로 앞장섰다 한다, 1985년 경신 고등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스포츠 서울에서 보도한 내용을 보면,
국내 축구계에 유명한 축구 5형제의 맏형인 유 동춘 전 경찰청 감독 과 국가대표출신 유 동관<영 등 포 공고 감독 역임> 유 동우 전남. 대전 선수 생활 후 대전 코치 역임. 유 동기 기업은행 선수 후 은행 근무. 유 동 욱 한양 대 포워드 후<구 암 초등 감독>은 고향에서,
고 채 금석 선생에게서, 유년기를 5형제가 ,차례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은, 축구계의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이외에도 최 재 모 . 정 태훈. 조 긍 연 선 수 등, 우리나라 축구계를 이끌어가는, 우리고장 출신들이, 많이 있고 , 대구대학 주전 멤버로 활약하는 골키퍼 박준호 선수와 ,
금석 배에서 뛴 선수 중에는, 프로 현역으로는 박 기성 선수와 박 주영 선수 ,이도성<대전팀> 등 유명한 선수들이 배출되고 있어, 이 대회의 명성이 날로 번창되게 알려지고, 금번 제17회 금 석 배 중고등부 대회에서는, 고등부 34개 팀 과 중 등 부 67개 팀 등, 총101개 팀이 출전 하였으며,
5월14일에 준결승전 과 5월16일에는 결승전이, 군산 월명공설 운동장 주경기장에서 화려하게 펼쳐질 계획이다, 91세 로 작 고 하시기 직전까지, 한국 축구발전에 기여하신, 이분의 경기가 열리는 군 산 시 에서는 숙소가 없어서, 아무성일 정도로, 숙박업계에 연일 북적거리는 인파와 음식점마다,
만원사례를 종종 볼 수 있어, 즐거운 비명이, 여기저기서 울리는 건 좋 으 나, 모처럼 우리 지방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모시는 일은, 누구나 여러 번 말을 해도, 부족한 말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 입장에서 행사를 잘 치루고,
칭찬을 많이 받는, 그날 그날 일어난 민원사항과 많은 일을 차근하게 정리해서, 보완하고 도와주는 ,전남 장흥군의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해서, 한 학교 선수단에 자원봉사자와 공무원이 한사람이 전담해, 애로 사항을 끝까지 해결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고,
선수단을 이끌고있는 익명을 요구한 학부형님의 이야기를 귀담아 볼것이다 , 그래야 1995년 12월26일 향년 91세에 작고하시기 까지. 한국 축구발전에 기여하신 큰 족적을 남기신, 선생님의 유지를 잘 받들기 위해, 우리시가 천연잔디와 인조 잔디 8개소의 운동장을 만들어 축구인프라를 구축하여,
타 지방자치 단체와 축구인 들 로 부 터 칭송이 자자한 , 이 대회를 시민들께서도 많이 관람에도 참여하고 사랑해 주시어, 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어. 소질 있고 유망한 어린축구 꿈나무들로부터 존경받는, 금 석 배 축구대회를 우리시에 계속 유치하는데 힘써야 .
진정한 축구인의 모습을 보여주신, 우리고장에서 배출한 채 금석 선생님의 헌신적인 삶 에 대 한, 보답이 아닐까 생각 한다 [출처] 내고향 군산 전의이씨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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